영화 ‘파이널리스트’ 속의 불편함들

2015년 퀸 엘리자베스 콩쿨 바이올린 부문 결선 과정을 다룬 영화 <파이널리스트>를 보았다. 퀸 엘리자베스 콩쿨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해마다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성악 부문을 번갈아 개최하는 대회로,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 콩쿨, 폴란드의 쇼팽 콩쿨과 함께 세계 3대 콩쿨로 꼽힌다. (세계 3대 콩쿨이라니 도대체 누가 결정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 단어는 내게 마치 세계 7대 혹은 8대 불가사의와 같이 들린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수많은 불편함들이 들어있다. 그 중에는 영화를 보기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불편함도 있었고,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거북하게 만들었던 불편함과, 영화가 끝날 즈음 입밖으로 불평하게 만든 엄청난 불편함도 있었다. 나는 이 불편함들에 대해 쓰고자 한다.

영화를 보기 전 예상했던 불편함은 바로 경쟁에 관한 것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형태의 경쟁이 존재한다. 가장 익숙한 형태의 경쟁이라면 학창 시절 매 학기 반복되던 중간, 기말고사가 있다. 학교 성적과 등수를 두고 벌어지는 이 경쟁은 초, 중,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점점 가열되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정점을 찍는다.

물론 경쟁은 학업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스포츠계의 경쟁인 올림픽, 월드컵 등의 국제 대회는 이미 단순히 프로 선수들이 서로 실력을 겨루는 차원에서 벗어나 국가 간의 경쟁, 혹은 거대한 축제가 되었다. 예술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등단과 데뷔를 꿈꾸는 작가들이 공모전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는 것은 오랜 역사이다. 최근에는 가수, 아이돌을 꿈꾸는 이들이 TV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민의 소중한 한 표 한 표를 얻으며 피라미드의 가장 위와 아래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클래식계에는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콩쿨들이 있다.

앞서 말한 세계 3대 콩쿨 중 폴란드의 쇼팽 콩쿨은 1927년 처음 열렸다. 제 1회 쇼팽 콩쿨에는 20세기의 유명한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결선까지 진출했지만 입상하지는 못했다. 후에 쇼스타코비치가 심사위원장을 지낸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 콩쿨은 1958년 처음 개최되었다. 냉전 시기 소련에서 열린 제 1회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는 미국인 반 클라이번이 우승했다. 영화 <파이널리스트>의 배경인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쿨은 1937년 바이올린 부문 개최로 시작되었다. 제 1회 퀸 엘리자베스 콩쿨에서는 소련의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우승했다. 그 외에도 세계 3대 콩쿨의 입상자들 면면을 살펴보면 참으로 화려하다. 이쯤 되면 나는 유명한 콩쿨이 그 수상자들을 유명하게 만드는지, 유명한 수상자들이 콩쿨들을 유명하게 만드는 건지 궁금해진다.

이렇게 유명하고 오래된 콩쿨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수요가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수요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왜 젊은 클래식 연주자들은 계속하여 콩쿨을 찾는가? 예선부터 본선, 결선.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조바심 속에 매 차례마다 새로운 곡들을 소화해야하고, 참가자들을 극도의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몰아넣는 이 대회에 연주자들은 왜 참가하는가?

그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영화 속 한 참가자는 ‘더 많은 연습 시간을 갖기 위해’ 콩쿨에 지원했다고 한다. 콩쿨이라는 명확한 목표 의식이 자신을 짧은 시간동안 집중해서 연습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콩쿨의 부상인 상금과 공연 기회를 위해 콩쿨에 지원할 것이다.(퀸 엘리자베스 콩쿨 바이올린 부문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부상은 상금 이외에도 각종 연주회와 음반 발매, 다음 바이올린 부문 대회까지 스트라디바리우스 ‘Huggins’의 대여가 있다.) 이러한 기회는 유명 레이블과의 계약 및 음반 발매, 세계의 유명 오케스트라, 지휘자와의 협연 기회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콩쿨은 클래식 연주자에게 종착점이 아니라 과정의 일환이다. 더 좋은 기회를 향해 거쳐가는 길 말이다.

그러나 콩쿨은 1등부터 순위가 매겨지는 경쟁이다. 예선부터 본선, 결선으로 올라갈수록 참가자의 수는 줄어들고, 결선에서도 1등은 단 한 명의 것이다. 따라서 결과는 중요하고, 경쟁은 당연히 치열할 수 밖에 없다. 보다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거쳐가는 과정에서 이처럼 지독히도 결과가 중요한 ‘콩쿨’이라는 것을 맞닥뜨린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영화 속 결선 참가자 이지윤씨와 임지영씨의 대화 장면은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바이올린을 전공해 유학을 하고 콩쿨에 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끊임없는 경쟁에 내몰렸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3대 콩쿨 결선에 진출한 그들은 결선을 앞두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것 같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정말로 그렇다.


영화의 시작, 퀸 엘리자베스 콩쿨의 결선 진출자(파이널리스트)들이 정해진다. 그들이 합숙을 위한 채플에 모여 받은 결선 지정곡은 도저히 연주가 불가능해보이는 극악의 난이도의 곡이었다. 이 곡을 익혀 리허설까지 끝내야 하는 시간은 고작 8일이다.

영화의 초반, 이지연씨는 곡을 익히고 연습을 하느라 몸이 방전되어 피곤하다고 말한다. 다른 결선 진출자들 역시 곡의 템포가 극악이고, 합숙 기간 동안 모든 통신 기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숙소 대문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하루 종일 연습하고, 먹고, 잘 수 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카메라에 담긴 세계 각국에서 온 파이널리스트들의 모습에는 차이점이 있다.

이 차이점이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인터뷰 장면이다. 미국인 참가자 윌리엄 헤이건과의 인터뷰에서는 그의 비브라토가 부드럽다며 그의 연주가 미국적이라는 말이 나온다. 헤이건은 이것에 대해 동의한다면서 자신이 미국에 있었을 때는 항상 프랑스와 독일 음악을 연주하면서도 자신의 연주가 미국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곳에 오니 정말 미국적인 것 그 자체라고 말한다.

조금 더 중요한 인터뷰는 한국인 이지윤씨의 인터뷰 장면이다. 처음에 인터뷰 진행자는 이지윤씨의 이름에 대해 몇 번이고 묻는다. 서양에서 First Name(이름)을 먼저 쓰고 Last name(성)을 뒤에 쓰는 방식과 한국에서는 성을 먼저 쓰고 이름을 뒤에 쓰는 방식이 다른 점이 그들에게 혼란을 부른 것이다. 인터뷰어는 또한 함께 결선에 진출한 또 다른 한국인인 임지영씨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지윤씨에게 재차 그녀가 임지영이 아닌, 이지윤이 맞는지 확인한다. 영어로 표기된 이름이 그들에게는 발음하기도 어렵고, 철자도 길고 복잡한 것이 비슷하게 보인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이름을 영어로 써야 하는 상황을 접했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을 상황일 것이다. 나 역시 잠시 독일에 살며 각종 행정용 문서에 이름을 쓸 때 (Name, Vorname) 칸을 마주하면 도대체 앞의 Name에 무엇을 써야 하는지(풀네임을 써야 하는지, 아니면 성만 써야 하는지) 헷갈려 서류를 아예 잘못 낸 적도 있었다. 겨우 이름을 써서 내도 독일식 알파벳 발음으로 읽힌 내 이름은 한국에서 불리던 내 이름과 달라 번번이 답답함을 느꼈다. 한국에선 ‘홍길동’으로 불리던 사람이 계속 자신을 ‘Gildong Hong’이라고 소개해야 하고, 이마저도 그들의 귀에는 익숙하지 않은 발음과 철자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제대로 내 이름을 발음한 경우는 지극히 소수였다.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진 것이 상대에게는 혼란스러운 것이었고, 반대로 상대에게는 굉장히 당연한 것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이 장면은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속 언저리에서 작은 불편함을 가져다 주었다. ‘경쟁’이라는 요소가 주는 불편함 외에도 문화적 차이로 인한 불편함이 추가된 것이다. 물론 이 두 번째 불편함에는 정말 여러 가지 요소가 있고, 때때로 클래식은 이러한 불편함을 음악이라는 비언어적 매개체로서 초월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클래식은 모든 국가와 계층을 하나로 묶고 통합해주는 역할을 하진 못한다. 클래식은 지루하고 딱딱하다는 생각, 클래식 공연 하면 떠오르는 비싼 가격이나 분위기가 부담스럽고, 잘 차려입어야 하는 인식 등은 클래식 음악에 다가가는 것 자체를 처음부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여기에는 문화적 요인도 작용한다. 클래식의 본고장은 유럽이다. 클래식 음악의 역사는 주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쌓인 것이었고, 러시아 역시 19세기 이후부터 이 대열에 합류했다. 결국 이렇게 쌓인 역사는 권위를 낳는다. (물론 20세기 이후에 이 흐름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기도 하지만, 클래식계의 오래된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은 매우 힘들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퀸 엘리자베스 콩쿨 현장의 모습은 이러한 권위의식의 결정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자는 말의 처음에 “폐하, 신사 그리고 숙녀 여러분”이라고 말한다. 이 한 마디만 들어도 속이 답답하지 않은가? 2015년에?

하지만 권위란 그저 갖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권위를 갖고 있는 이는 그에 걸맞는 책임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영화 속 퀸 엘리자베스 콩쿨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이 점에 대해 많은 의문과 실망, 그리고 불쾌함의 정점을 찍는다.

콩쿨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결선의 연주가 모두 끝나고, 마지막으로 결과 발표가 남았다. 세계 3대 콩쿨 중 하나, 벨기에 여왕의 이름을 내건 퀸 엘리자베스 콩쿨의 우승자는 바로…..

이지윤! 이라는 이름이 불린다.

이지윤씨는 놀라며, 무대 위로 걸어 나가 박수를 보내는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한다. 그러나 그녀의 뒤로 심사위원석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김남윤씨는 호명자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는, 이지윤씨를 향해 한국 말로 (입 모양상) “너 아니야.”라고 말한다. 여기서 모두가 경악한다. 그로부터 3년여 뒤, 영화관 객석에 앉아있던 관객들도 경악한다. 나도 경악했다. 곧 이어 호명자는 착오가 있었다고 우승자는 이지윤씨가 아니라 임지영씨라고 말한다. 이지윤씨는 서둘러 무대 뒤로 들어가고 임지영씨가 나와 수상한다.

착오로 우승자를 잘못 호명하는 엄청난 착오를 벌이고 난 뒤, 호명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와 ‘임’은 한 글자 차이라서 실수를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죠.”

네? 뭐라구요? 권위 있는 세계 3대 콩쿨인 퀸 엘리자베스 콩쿨에서 우승자 이름을 잘못 호명해 다른 사람이 나왔다가 들어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죠.’라는 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일인가요?

물론 그 상황에서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말그대로 호명자가 실수한 것이고,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인데. 그러나 결선 과정을 무대 뒤에서 찍은 카메라에 담긴 또 다른 장면은 이것이 실수인지, 그렇지 않다면 다른 무엇인지 의문을 품게 만든다.


시간을 조금 앞으로 되돌려 결선 연주 차례를 앞두고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지윤씨에게 사회자가 다가가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묻는다. 이지윤씨는 영어식으로 ‘지윤 리’ 라고 말한다. 사회자는 그 이름을 한 번 따라하고 무대로 나간다. 그러나 사회자가 무대 위에서 소개하는 이름은 ‘지윤 리’가 아니다. 발음을 실수한 것이다. 그것을 들은 이지윤씨는 “저건 내 이름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지휘자 마린 올솝은 “그래도 비슷하게 들렸다.”고 말하고는 함께 무대로 나간다.

이 장면과 앞선 합숙 당시 인터뷰 장면에서 진행자가 임지영이라는 이름과 이지윤이라는 이름을 헷갈려 하던 장면이 겹친다. 카메라는 ‘이지윤’이라는 이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혼란과 실수를 몇 차례 담았다. 처음에는 사소해보이던 실수가 영화의 끝에 가서는 엄청난 실수로 끝을 맺는다. 물론 이것은 실수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라는 말도 사실이다. 한국인의 영어 이름이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지윤 리’라는 이름을 발음해야 했던 사람이, 우승자의 이름을 호명해야했던 사람이 사전에 몇 번이라도 발음을 확인하고 연습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단 12명 밖에 되지 않는 결선 참가자들의 이름 발음을 확인하는 것은 그들에겐 그토록 번거롭고 힘든 것인가?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권위라는 것은 우승자 이름을 다른 사람으로 잘못 부른 일을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이다.’라고 말하는 그런 것인가?


영화 <파이널리스트>는 이렇게 보는 내내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콩쿨이라는 소재를 영화로 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 브레히트 반후니커가 선택한 방법은 치열한 결선 무대 연주 장면으로 긴 상영 시간을 채우는 것도, 파이널리스트들의 극적인 개인사나 라이벌 의식으로 드라마를 이끄는 것도 아니었다. 영화는 담담했고, 연주 장면 역시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연주 영상을 보고 싶다면 유투브를 보면 된다. 콩쿨 참가자들의 치열한 경쟁과 드라마를 보고 싶다면 만화 <피아노의 숲>을 추천한다. 그러나 영화 <파이널리스트>는 또 다른 시선에서 본 콩쿨을 담고 있고, 콩쿨에 대해 조금 다른 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불편함도 필요하다. 의식하지 못하는 불편함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