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도시를 세우고 ‘마하고니’라고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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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1일부터 14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는 국립오페라단의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 공연이 진행되었다.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각본을 쓰고 쿠르트 바일이 작곡한 오페라로 한국에서는 이번에 초연되는 작품이다.

한국 청중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 그 내용과, 이번 국립오페라단의 공연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들을 살펴보자.


1. 마하고니의 시작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7년이다. 작곡가 쿠르트 바일은 1927년 바덴바덴 음악제에 낼 작품을 위촉받고, 브레히트의 <가정기도서(1927)>에서 고른 다섯 개의 시와 마지막에 ‘대단원’을 추가한 20분짜리 극을 만든다. 이 작품은 성공적으로 공연되고, 이후 바일과 브레히트는 바로 오페라 <마하고니>의 제작에 들어간다. 오페라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은 1930년 3월 9일 라이프치히 노이에스 테아터(Neues Theater)에서 초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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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이 초연된
라이프치히 노이에스 테아터

그러나 1930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마하고니>의 초연 도중 나치 돌격대가 극장 안에서 난동을 일으키고, 이후 다른 도시에서의 공연 역시 비슷한 일이 벌어지거나 공연이 취소된다. 또한 <마하고니>의 자본주의 비판과 무정부주의적인 내용은 많은 공격을 받는다. 결국 각본에서 비난의 대상이 된 부분을 다소 수정한 버전이 1931년 12월 베를린에서 공연된다.


2.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

오페라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의 시작은 도시의 형성이다. 경찰에게서 도망치고 있던 사기꾼 베그빅 부인과 모세, 패티는 자동차가 고장 나서 멈춘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 그들은 새 도시의 이름을 ‘마하고니’로 정하고, 이 도시는 그물망 도시라고 말한다. 왜 마하고니는 그물망 도시인가? 바로 그물처럼 먹이를 낚아채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마하고니의 먹이는 주머니 두둑하고 욕망을 품고 있는 남자들이다.

이처럼 마하고니는 스스로 생산하여 돈을 버는 도시가 아니다. 마하고니는 이미 돈 있는 남자들이 찾아와 욕망을 충족하는데 소비함으로써 기능하고, 존재하는 도시이다. 남자들의 가장 대표적인 욕망은 술, 그리고 여자이다. 따라서 마하고니에는 욕망을 채워줄 여자들이 필요하다. 제니와 여섯 명의 여자들이 부르는 유명한 노래 ‘알라바마 송‘이 여기에서 등장한다.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 중’알라바마 송’, 1998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무엇보다 마하고니에는 욕망을 충족하는데 돈을 쓸 남자들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극에서는 알래스카에서 7년간 벌목꾼으로 일해 많은 돈을 번 지미, 잭, 빌, 조 네 사람이 등장한다. 마하고니에 도착한 그들은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고른다. 벌목꾼 지미는 제니를 고르지만, 오래지 않아 마하고니에서의 삶에서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와중 마하고니에 허리케인이 다가온다. 두려움에 떠는 마하고니 사람들 속에서 지미는 역설적으로 행복의 법칙을 발견한다. 바로 ‘네 맘대로 해‘이다. 어차피 허리케인이 모든 걸 다 부숴버릴 바에는 자신이 먼저 부수겠다며, 모든 금지와 법을 파괴하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살자는 것이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난다. 바로 허리케인이 마하고니를 비껴간 것이다. 기뻐하는 마하고니 사람들은 이날 밤 깨닫게 된 새로운 법칙에 따라 살기 시작한다.

첫째, 실컷 먹는 것을 잊지 말자

둘째, 사랑을 나누자

셋째, 권투 구경을 해야 한다

넷째, 실컷 술을 마시자

그리고 명심할 일은

‘네 맘대로 하는 것’이다.

이 법칙에 따라 마하고니의 사람들은 폭식, 성욕, 권투 구경, 폭음을 즐긴다. 그리고 사람들은 점점 파멸한다. 지미와 함께 알래스카에서 온 잭과 조는 차례차례 폭식과 권투로 죽는다. 그리고 돈이 다 떨어져 술값을 치르지 못한 지미는 결국 법정에 선다. 지구상에서 존재하는 범죄 중 가장 끔찍한 범죄, 즉 돈이 없는 죄를 저지른 지미에게 마하고니의 법정은 사형을 선고한다.


3. 마하고니의 음악

오페라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은 흔히 떠오르는 <토스카>, <투란도트>, <아이다> 같은 고전 오페라와는 많은 면에서 다르다. 대표적인 차이로는 음악을 들 수 있다. <마하고니>는 클래식 이외에도 재즈를 비롯하여 여러 장르의 곡을 짜깁기 한 것과 같은 구성이다. 특히 청중들에게 익숙한 음악을 많이 사용하고 있어, 오히려 <마하고니>의 음악은 전통 오페라보다 쉽게 즐길 수 있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마하고니>에서는 아리아가 아닌 송(Song)의 사용이 돋보인다. 가장 잘 알려진 송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알라바마 송’이 있다. 데이비드 보위를 비롯하여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알라바마 송’이 바로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 밖에도 ‘마하고니 송’, ‘버나레스 송’, ‘멘덜리 송’ 등 분절적인 송의 사용과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연주해보았을 바다르체프스카의 ‘소녀의 기도’ 역시 중요하게 사용된다.

이렇게 오페라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은 기존 오페라 장르의 형식을 여러모로 깨고 있다. 그러나 쿠르트 바일과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 부분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바일은 작곡가로서 전통적인 오페라의 형식을 개선하려 하는 입장이었다. 반대로 브레히트는 오페라 장르의 혁신은 무의미하다고 보고 오페라의 파괴를 제안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페라의 오래된 형식이 아닌, 오페라라는 장르가 기여하는 낡은 사회적 상황 자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4. 국립오페라단의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

국립오페라단에서는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 공연을 기획하며 크게 두 가지 차별성을 두었다. 첫 번째는 무용의 활용이었고, 두 번째는 극의 시대 배경을 17~18세기 유럽으로 설정한 점이다.

첫 번째로 이번 국립오페라단의 공연에서 활용한 무용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현대적인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극의 거의 대부분 장면에서 등장하여 춤을 추었다. 마치 바일의 음악을 그대로 시각화한 것 같은 유려한 동작들은 음악을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고, <마하고니>를 무용으로는 이렇게 풀어갈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공연이 오페라라는 사실이다.

오페라는 종합예술이다. 단순히 음악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닌, 음악과 성악가들의 노래, 연기, 동작, 무대장치들이 서로 어우러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무용이라는 요소까지 추가했을 때 과연 이것이 다른 요소들과 조화로운지에 대해서 국립오페라단의 제작은 의문점을 갖게 했다.

국립오페라단의 <마하고니> 공연 중 무용수와 성악가가 함께 나오는 장면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무용수들과 달리 성악가들의 움직임이나 공간 활용은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하나의 종합 예술인 오페라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한쪽에서는 콘서트 오페라를, 다른 한쪽에서는 현대무용 공연을 동시에 하는 것 같은 단절감이 극의 몰입을 다소 방해했다.

특히 이 의문은 무용수들이 없는 장면들에서 확실히 몰입도가 높아지는 것과 대비되었다. 바일의 음악을 무용으로 시각화하는 시도는 좋았지만,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 무용의 비중을 줄이는 것이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두 번째로 국립오페라단에서는 마하고니의 시계를 17~18세기 유럽 절대왕정시기로 돌렸고, 성악가들은 바로크 의상을 입고 나왔다.

공연 시작 전 진행된 해설에서는 국립오페라단이 <마하고니>의 시대 배경을 17~18세기로 설정한 이유는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이 시기를 자본주의의 출발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성악가들이 입고 나오는 바로크 의상은 일종의 기만술, 즉 ‘역할극 게임’, ‘코스프레’에 불과할 뿐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렇게 시대 배경을 설정했다면 극의 내용 역시 어느 정도는 17~18세기에 맞춰 각색되어야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립오페라단의 공연은 브레히트의 각본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바로크식 의상을 입은 성악가들과 달리 무대 장치와 무용수들의 의상은 모두 현대적이었던 점 또한 어울리지 않았다. 성악가들이 입고 나온 바로크 의상은 말 그대로 형식적인 코스프레에 그칠 뿐, 이를 뒷받침하는 시대상이 반영된 내용이나 ‘역할극 게임’에서 참가자들에게 부여되는 역할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국립오페라단에서 굳이 17~18세기 유럽을 선택해야 했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현대 한국 사회에 맞게 각색했다면 극의 내용이 더 잘 다가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브레히트는 주인공 이름을 각각 공연되는 나라의 이름으로 바꿀 수 있다고 덧붙이고 있기도 하다.

그 밖에도 한 가지 더 아쉬웠던 점은 도시의 이미지, 특히 도시의 번영 과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립오페라단의 <마하고니>에서 도시의 이미지는 오직 모자이크 형식으로 나타나는 영상으로 잠깐 등장한다. 이 영상에서 도시의 형성과 몰락 과정을 어느 정도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함께 진행되는 극의 장면과는 그다지 어우러지지 않았다. 도시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줄 무대장치나 영상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5. 마하고니가 남긴 것

국립오페라단의 <마하고니>는 연출상 몇몇 아쉬움을 남긴 부분이 있었지만, 남긴 점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작품의 초연이라는 점 이외에도 공연장에서는 <마하고니>가 관객들에게 미치는 여파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폭식으로 잭이 사망하는 부분에서는 객석에서 웃음이 나왔다. 이 장면은 공연 전 해설에서 드라마트루그가 언급한 것처럼 최근 한국에서 유행하는 먹방과도 연관 지어 볼 만하다. 2019년 한국을 사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고, 이런 삶 속에서 조금이나마 남는 여가 시간에 우리는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자극적인 영상을 찾게 된다.

그중 먹방은 내가 직접 먹지 않더라도 남이 폭식하는 장면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폭식의 끝은 사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고, 이는 잭의 모습을 통해 극적으로 나타난다. 잭이 사망하고, 접시를 올려두었던 식탁이 관이 되는 장면에서 나왔던 관객의 웃음은 한 사람의 어리석은 욕망에 대한 조소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객석에서는 “첫째, 실컷 먹는 것을 잊지 말자. 둘째, 사랑을 나누자. 셋째, 권투 구경을 해야 한다. 넷째, 실컷 술을 마시자. 그리고 명심할 일은 ‘네 맘대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반복되자 불만을 드러내는 관객을 볼 수 있었다. 특히 2, 3막으로 갈수록 극의 자본주의 비판이 강해져 누구나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브레히트 역시 <마하고니> 주석에서 이 작품이 선동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으며, 국립오페라단의 공연에서도 이는 확연히 드러났다. 이렇듯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은 단순히 몰입하고 미식적으로 즐기는 오페라가 아니라 관객을 불쾌하게 만들고, 불쾌한 지점에 대해 토론하게 만드는 오페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공연에서 <마하고니>의 역할이 제대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가장 대범하다고 생각한 장면은 ‘신의 놀이’가 나오는 부분이다. 지미의 사형 준비가 끝나면 마하고니 신의 놀이가 시작된다. 위스키에 빠진 신이 마하고니에 와서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려고 한다는 내용의 노래는 결국 마하고니 자체가 지옥이었으며, 이 도시에 발을 들이는 순간 파멸은 피할 수 없었음을 깨닫게 한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는 성악가가 주교 옷을 입고 노래하여 직설적인 가사의 효과가 극대화되었다.

다소 무정부주의적이기까지도 한 메시지를 던지며 막을 내리는 마하고니를 보며 이 작품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은 그저 즐기기 위한 오페라가 아니며, 선과 악이 구분되거나, 어떠한 직접적인 교훈을 주지도 않는다. 보는 이에게 남는 것은 씁쓸함과 커다란 부조리의 목격이다. 그러나 오페라하우스를 나서는 관객들은 다시 부조리가 가득한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글은 2019년 7월 16일 아트인사이트에 게시된 글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2772)

반복되는 역사에 관한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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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8일 예술의전당에서 KBS교향악단의 제743회 정기연주회가 열렸다. 연주 프로그램은 아람 하차투리안의 <스파르타쿠스 모음곡(발췌)>과  피아니스트 다니엘 하리토노프가 협연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1번>이었다.

 연주회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곡은 단연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1번>이었다. 네 악장의 총 연주 시간이 한 시간이 넘는 이 곡을 지휘자 요엘 레비와 오케스트라는 쉬지 않고 내리 달렸다. 그야말로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공연이었다.
실제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1번>은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폭풍을 묘사하고 있다. 바로 1905년 1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1. 1905년 1월 9일 일요일

1905년 1월 9일(구력) 일요일, 성상과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초상, 십자가, 교회의 깃발을 든 군중들이 겨울 궁전을 향해 행진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푸틸로프 공장 등에서 일어난 대규모 노동 분쟁, 파업과 관련하여 차르에게 직접 청원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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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르의 초상을 들고 행진하는 시위대

시위를 이끈 게오르기 가폰 신부가 작성하고, 노동자들이 서명한 청원서에는 정당한 임금, 하루 8시간 노동, 초과 근무의 제한, 노동 분쟁의 자유 등 노동 조건 개선 내용 이외에도 선거로 선출된 의회의 구성, 언론의 자유, 의무 교육, 토지 상환세 폐지 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나르바 관문 근처에서 시위대가 마주한 것은 무장한 군인들이었다. 군인들은 먼저 공중으로 두 번 사격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고, 비무장한 시위대를 향한 발포가 시작되었다.

이 날 사상자의 수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민중들은 이제 차르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는 것이다.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생겨나는 아수라장 속에서 누군가가 “더 이상 신은 없다. 더 이상 차르도 없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은 수백 년간 고통스럽게 이어져온 어떤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날이었다. 성상을 들고 아버지-차르에게 청원하는 시위대는 앞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2.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1905년’

러시아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진 1905년의 바로 다음 해인 1906년에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시위대가 향하던 겨울 궁전이 서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이다. 어린 쇼스타코비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917년 혁명과 이후 벌어지는 러시아의 중요한 역사 사건들을 경험했다. 이는 단순한 목격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평생에 걸쳐 이 일들을 표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교향곡 11번> ‘1905년’은 다소 충격적으로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을 다루고 있다. 네 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에는 각 악장마다 부제가 붙어있다. 1악장은 ‘궁전 앞 광장‘, 2악장은 ‘1월 9일‘, 3악장은 ‘영원의 기억‘, 4악장은 ‘경종‘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곡에는 총 여섯 개의 혁명가가 인용되어 있다. 이렇게 노골적인 <교향곡 11번>은 언뜻 당시 소련 예술계를 지배하던 방법론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결과물로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이 곡이 작곡, 초연된 배경에는 정치 이념적 요소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에 한 번이라도 귀 기울여 본 사람은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특정 국가의 이념을 홍보하기 위한 곡이 아니다. 이 곡은 국가와 시대, 어쩌면 이념을 뛰어넘어 지독하게 반복되어 온 어떤 역사에 대해 말하는 음악이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1번> ‘1905년’은 때때로 고통스러워하고, 때때로 분노하며 이 반복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3.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속 피의 일요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1악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앞 광장에서 시작된다. 넓고 황량한 궁전 앞 광장의 테마는 현악기의 느린 선율로 묘사된다. 이 테마는 나머지 악장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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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앞 광장

잠시 뒤 하나의 노래가 등장한다. 혁명가이자 죄수들의 노래 <들어주오!>이다. 서로 다른 악기들로 주고받는 혁명가 <들어주오!>는 궁전 앞 광장의 테마에 묻힐 듯 묻히지 않으며 이어진다. 그러나 1악장을 마무리하는 것은 다시 궁전 앞 광장 테마이다. 이 반복되는 선율을 듣고 있으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전 앞 광장의 광활함에 현기증을 느낄 것만 같다.

그러나 이어지는 2악장은 시작부터 무언가 달라진다. 2악장은 ‘1월 9일‘ 즉, 피의 일요일이다. 음악은 더 이상 텅 빈 광장의 삭막하고 광활함을 말하지 않는다. 차르에게 직접 청원하기 위해 겨울 궁전으로 향하는 군중들이 나타난다. 청원서를 가득 채운 민중들의 호소와 시위대의 움직임에 이어 또 다른 노래 ‘오오, 황제! 우리들의 아버지여’가 등장한다. “오오! 황제, 우리들의 아버지여! 주변을 돌아봐 주오. 황제가 거느리는 부하들로 인해 우리들은 안락한 생활도 돈도 잃었다오.”라는 가사는 고통받으면서도 아직까지 차르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지 못한 민중들을 묘사한다.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2악장 속 민중의 호소를 듣고 있으며 또 다른 곡이 떠오른다. 바로 무소르그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이다. 나라가 혼란해지고, 굶어가는 민중들은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를 향해 빵을 달라고 애원한다. 300년이 지난 뒤, 민중들은 또다시 차르에게 호소한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것은 무엇인가?

민중들의 호소와 애원은 충격적인 대답으로 돌아온다. 마치 총성을 묘사하는 것과 같은 타악기의 연주가 시작된다. 군인들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것이다. 총에 맞아 죽고, 도망치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아수라장이 표현된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그 흉포함을 지독히도 생생히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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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일요일을 묘사한 이반 블라디미로프의 그림

이어지는 3악장 ‘영원의 기억‘은 희생자를 기리는 장송곡이다. 이 부분에서도 두 개의 혁명가가 인용된다. 담담하게 희생자를 추모하던 곡은 점점 힘을 더해가며 분위기가 변해간다. 오케스트라 선율의 밑바닥에서 마치 심장박동 소리처럼 시작되는 팀파니의 연주는 금관으로 이어지며 하나둘씩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마지막 4악장은 ‘경종‘이다. 4악장의 시작에서 귀를 파고드는 선율은 혁명가 ‘격노하라, 압제자들이여!’이다. “격노, 격노하라, 압제자들이여! 우리를 비웃으라! 감옥과 족쇄로 우리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라! 우리의 몸이 짓밟힐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강력하다! 수치, 수치, 수치스러워하라! 압제자여!”라는 가사처럼 민중의 분노와 투쟁의지를 담은 4악장의 선율이 이어진다. 이어서 또 다른 혁명가 ‘바르샤반카’가 등장한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4악장에 쓰인
혁명가 ‘격노하라, 압제자들이여!’

한동안 이어지던 격렬한 음악은 다시 1악장 궁전 앞 광장 테마로 돌아온다. 마치 과거의 모든 일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곳에서 일어날 일들을 경고하는 것 같다. 4악장의 마지막은 다시 시작되는 민중들의 투쟁 의지와 다가올 미래를 알리는 종소리로 끝난다.


4. 반복되는 역사와 음악

쇼스타코비치는 한 편의 서사시처럼 피의 일요일 사건을 생생히 묘사한 <교향곡 11번>을 1957년 8월 4일에 완성한다. 이 곡은 1957년 10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초연되었다. 1957년은 10월 혁명 40주년이 되는 때이기도 하다. 쇼스타코비치의 다른 교향곡들처럼 <교향곡 11번> 초연 역시 음악계, 나아가 소련 문화, 정치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전후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1번>은 어느 정도 체제 선전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차르에 대한 민중들의 신뢰는 완전히 무너졌다. 결국 1917년 혁명을 통해 차르는 폐위되고 볼셰비키 정권이 세워졌다. 그로부터 40년이 되는 해, 소련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을 다룬 곡을 갖고 온 것이다. 곡의 생생함과 중요한 모티브로 인용된 혁명가 역시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곡을 소련 정권의 체제 선전 음악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많은 것을 놓치는 일이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1번>이 다루고 있는 것은 1905년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만이 아니다. <교향곡 11번>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쇼스타코비치가 이 곡을 작곡할 무렵인 1956년 11월에 발생한 소련의 헝가리 혁명 유혈 진압 역시 주목할 만하다. <증언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이 ‘1905년’으로 불리긴 하지만 1957년 즈음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1번>과 1956년 헝가리 혁명의 관련성에 대한 언급은 다른 지인들의 회고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11번>를 두고 한 말 중 나에게 가장 와닿는 단어는 바로  ‘반복성‘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증언>에서 <교향곡 11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역사에서는 많은 일들이 되풀이되는 것 같다. 물론 똑같은 사건이 정확하게 반복될 수는 없다. 다른 점이 분명히 있기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들이 반복된다. 사람들은 대개 유사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곤 한다. 무소르그스키를 연구하거나 <전쟁과 평화>를 읽어보면 이 점은 명백하다. <교향곡 11번>에서 나는 이러한 반복성을 나타내고자 했다.”

– <증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82쪽


역사는 반복된다. 민중과 지배자의 갈등은 지독히도 오랫동안 반복된 역사이다. 민중은 자신의 권리를 호소하며 지배자에게 나아가지만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원래대로라면 그들을 지켜야 하는 군대이다. 군대는 발포하고, 민중들을 짓밟는다. 신뢰는 무너지고 사람들은 분노한다. 그리고 이것은 러시아만의 일이 아니다.

집요하게 반복되어 온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쇼스타코비치의 말처럼 사람들은 대개 비슷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4악장의 마지막 종소리는 민중들의 분노와 투쟁 의지를 넘어 앞으로 다가올 역사에 대한 예고로 들린다. 이 종소리가 알리고 싶어 하는 것은 미래를 향한 결의일까, 경고일까.


참고 자료

– 솔로몬 볼코프 엮음, 김병화 옮김, <증언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온다프레스, 2019

– 존 M. 톰슨 지음, 김남섭 옮김, <20세기 러시아 현대사>, 사회평론, 2004

– 음악지우사 편, 음악세계 옮김, 쇼스타코비치, 음악세계, 2002

– Elizabeth Wilson, Shotakovich : A Life Remembere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6

– Laurel E. Fay, Shostakovich : A Life,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 무소르그스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토리노 왕립 극장, 2010


이 글은 2019년 7월 13일 아트인사이트에 게시된 글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2539)

유리구두 없는 신데렐라

Writing

신데렐라 하면 가장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재투성이, 계모의 구박, 왕자, 무도회, 요정의 도움, 12시가 되어 풀리는 마법 등 다양할 것이다. 그중 하나의 이미지를 꼽자면 바로 유리구두가 있다.

12시가 되어 마법이 풀리자 신데렐라는 황급히 무도회장을 떠난다. 왕자는 그 뒤를 쫓지만 신데렐라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유리구두 한 짝뿐이다. 왕자는 유리구두를 들고 신데렐라를 찾아 나서고, 왕자가 신데렐라를 찾는 것도 바로 이 유리구두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여기 유리구두 없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있다. 바로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장-크리스토프 마이요가 제작한 발레 <신데렐라>이다. 지난 6월 12~14일 예술의 전당에서는 바로 이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신데렐라> 공연이 있었다. 유리구두가 없는 신데렐라의 이야기는 과연 어떤 것일까?


1. 프로코피예프의 <신데렐라>가 태어나기까지

<신데렐라>는 프로코피예프의 여덟 번째 발레곡이다. 프로코피예프는 발레 뤼스와의 협업으로 <알라와 롤리>(1914-15), <어릿광대 이야기>(1915), <강철의 걸음>(1925-26), <탕자>(1928-29) 네 개의 발레곡을 쓰며, 그 밖에 1924년에는 <트레페즈>라는 짧은 발레곡을 작곡하기도 한다. 1929년 디아길레프의 사망으로 발레 뤼스가 해산된 이후에는 파리 오페라의 청탁을 받아  <드네프르 강가에서>(1930-31)라는 발레를 쓴다.

프로코피예프의 일곱 번째 발레는 유명한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1934년 레닌그라드(현 상트 페테르부르크) 키로프 극장(현 마린스키 극장)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지만, 이후 볼쇼이 극장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여러 복잡한 상황들로 인해 1935년 10월 완성된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가 초연되는 것은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 국립 브루노 극장에서였다.

그리고 1940년, 레오니드 라브롭스키의 안무와 갈리나 울라노바가 줄리엣 역을 맡은 레닌그라드 키로프 극장에서의 공연으로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은 마침내 성공을 거둔다.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성공 이후 프로코피예프와 키로프 극장은 다음 발레를 의논하게 된다. 그들의 선택은 <신데렐라>였다. 수많은 신데렐라 판본 중 프로코피예프가 토대로 삼은 것은 프랑스의 작가 샤를 페로의 <상드리용 Cendrillon>(1697)을 러시아의 민속학자 알렉산드르 아파나시예프가 각색한 것이었다.

1940년 11월, 프로코피예프는 키로프 극장과 발레 <신데렐라>를 계약하고, 1941년 3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발레곡의 절반 가량을 완성했다고 말한다. <신데렐라>는 키로프 극장에서 1941년 초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전쟁이 시작된다.

전쟁 발발로 발레 <신데렐라>의 초연은 무기한 연기된다. 키로프 극장은 레닌그라드에서 페름으로 옮겨가고, 프로코피예프는 처음에는 코카서스 날치크로, 그다음에는 트빌리시로 향한다. 이후 그는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시테인과 <이반 뇌제>를 작업하기 위해 에이젠시테인이 있는 알마-아타로 떠난다. 전쟁 기간 동안 프로코피예프는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작품을 작업하는데, 이때 작업하고 있던 곡들이 영화 <이반 뇌제>, 오페라 <전쟁과 평화> 등이었다. 그가 미완성이었던 발레 <신데렐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1943년 7월에서야 였다.

1943년, 페름으로 피난가 있던 키로프 극장 측에서 발레 <신데렐라>의 리허설을 시작할 의향을 보이자 프로코피예프는 알마-아타에서 페름으로 이동한다. 페름에 도착하자마자 프로코피예프는 <신데렐라>의 작곡을 다시 시작하고, 1944년 2월에는 키로프 극장이 발레의 리허설에 착수한다. 그러나 1944년 1월 27일 레닌그라드 봉쇄가 풀린 이후 다시 레닌그라드로 돌아간 키로프 극장은 발레 <신데렐라>의 공연을 <백조의 호수> 공연 이후로 미룬다.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백조의 호수>는 러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발레 중 하나로, 전쟁으로 피폐해진 레닌그라드의 문화가 살아남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연이기도 했다.

결국 발레 <신데렐라>는 1945년 11월 21일,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된다. 처음 발레의 제작이 언급되기 시작하고 5년 만이었다. 그러나 프로코피예프의 오케스트레이션은 볼쇼이에게 너무 가볍다는 이후로 1945년 볼쇼이에서 공연 당시 보리스 포그레보프라는 타악기 연주자가 오케스트레이션 한 버전으로 연주되었다. 당시 프로코피예프는 1945년 1월 발병한 뇌졸중에서 회복 중이었기에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46년 4월 8일 레닌그라드 초연에서야 발레 <신데렐라>는 프로코피예프의 원래 오케스트레이션 버전으로 공연된다.


2.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신데렐라>

프로코피예프의 발레곡 <신데렐라>의 전반적인 색조는 어둡다. 프로코피예프 음악의 서사성과 서정성은 대단하지만, 그의 신데렐라는 전반적으로 무겁다. 예를 들어 신데렐라에서 중요한 무도회 장면에서 연주되는 왈츠는 반짝이는 무도회장의 샹들리에보다는 한 톤 어두운 자줏빛의 벨벳이 연상되는 묵직함을 갖고 있다. 12시를 알리는 종이 치는 장면의 음악은 어떠한가. 신데렐라와 왕자의 행복한 시간이 무너짐을 묘사하는 음악은 짓궂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소 기괴한 면이 있다.

그래서일까. 프로코피예프의 또 다른 발레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해서 <신데렐라>는 적은 수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음악 역시 전반적인 색채가 그다지 밝지는 않다.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극적인 비극 서사와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잘 어울리지만, <신데렐라>의 서사와 음악은 상대적으로 덜 어울린다고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그러나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신데렐라> 안무에는 프로코피예프 음악의 묵직함을 들어 올리는 무언가가 있다.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신데렐라>는 현대적이고 익살스럽다. 무대장치는 단순하며, 의상 역시 고전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이 공연에는 신데렐라의 가장 특징적인 소재 한 가지가 빠져있다. 바로 유리구두이다.


3. 유리구두를 대신한 것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소재가 바로 유리구두이다. 한국판 <신데렐라>로 볼 수 있는 콩쥐팥쥐전에서도 한국식 유리구두인 꽃신이 등장한다. 그러나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를 과감히 없앴다. 뿐만 아니다. 이 공연에는 신데렐라를 무도회장으로 데려다준 호박 마차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데렐라와 왕자를 연결해주었을까?

그 시작은 발레 첫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대 한 편에 엄마의 드레스를 손에 들고 그리워하는 신데렐라가 앉아있고, 다른 쪽에서는 신데렐라의 아빠와 엄마가 애틋한 사랑의 춤을 춘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곧 이별의 시간이 찾아온다. 바닥에 쓰러진 신데렐라의 엄마 위로 금가루가 떨어진다. 신데렐라의 아빠는 이렇게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지만, 신데렐라의 엄마는 요정으로 다시 등장한다.

그렇다. 이 공연에는 디즈니 만화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비비디 바비디 부 노래를 부르는 요정 대모가 없다. 대신 신데렐라를 돕는 것은 금빛 의상을 입고 나오는 매혹적인 요정이다. 그는 바로 신데렐라의 엄마이다.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갈 때 입는 옷 역시 요정, 즉 엄마의 흰 드레스이다. 이때 신데렐라의 발에는 유리구두 대신 금가루가 묻는다. 신데렐라를 두고 무도회장으로 향한 의붓언니들이 던져준 콩 그릇은 어느새 신데렐라의 발을 장식할 금가루가 담긴 그릇으로 변신한다. 무엇보다 그의 발은 맨발이다.

발은 무용수에게 중요하다. 발레를 보면 무용수들이 발끝의 움직임 하나하나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토슈즈를 신은 그들의 발은 곡선을 그리며 동작을 더욱 우아하게 만든다. 그러나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신데렐라>에서 신데렐라는 토슈즈를 신지 않은 맨발이다. 무도회장에 들어서는 신데렐라의 모습에서 가장 먼저 조명을 받는 것은 그의 금가루가 묻은 맨발이다. 왕자는 그의 발에 매혹되어 무릎을 꿇고, 왕자가 다시 신데렐라를 알아보는 것 역시 그의 맨발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멍든 의붓언니들의 발과 대비되며 신데렐라의 순수함과 자유를 부각한다.

극 중 신데렐라와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은 계모와 의붓언니들이다. 소박하고 간편한 신데렐라의 의상과 달리 의붓언니들의 의상은 왜곡되어 있다. 무도회를 갈 때 신데렐라가 입는 옷은 만화영화 속 풍성한 드레스가 아니다. 그는 엄마가 물려주신 단순한 흰색 드레스를 입는다. 그러나 의붓언니들이 입는 옷은 반쪽 짜리 코르셋과 붉은 천으로 된 반쪽 짜리 드레스이다. 계모 역시 끝이 뾰족한 꼬리 모양의 뼈대를 입고 나온다. 무도회가 끝나고 왕자가 신데렐라의 집으로 찾아오는 장면에서의 의상은 더욱 노골적이다. 두 의붓언니는 막 성형수술을 받은 환자처럼 얼굴과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다. 신데렐라를 찾기 위해 일일이 발을 확인하는 왕자가 마주한 것은 두 언니의 검게 멍든 발이다. 그것은 토슈즈를 신지 않은 맨발의 신데렐라와 대비된다.


4. 고전 속 자유

신데렐라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고전 동화이다. 글로 기록된 신데렐라 이야기의 초기 버전은 기원전 9세기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소재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무도회에서 도망가다가 신발 한쪽을 잃어버리고, 왕자가 그 신발의 주인을 찾아 결혼하는 큰  얼개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신데렐라>와 거의 비슷하다.

유럽에서 나타난 <신데렐라> 중 유명한 것은 그림 형제의 전래동화 모음집에 수록된 <재투성이 아가씨 Aschenputtel>이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다소 잔혹하기로 유명하다. 왕자가 구두의 주인을 찾기 위해 신데렐라의 집으로 왔을 때, 계모는 자기 딸의 발을 구두에 맞추기 위해 첫째 딸의 발가락과 둘째 딸의 발뒤꿈치를 자른다. 덕분에 왕자는 신데렐라의 의붓언니를 구두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발에서 나온 피 때문에 사실이 들통난다. 결국 왕자는 구두의 진짜 주인을 찾고 신데렐라의 결혼식에서 비둘기가 의붓언니들의 눈을 쪼아 먹는다.

이러한 잔혹한 처벌은 한국판 신데렐라 <콩쥐팥쥐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역에 따라 서사에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콩쥐, 혹은 콩쥐의 남편은 팥쥐를 죽인다. 그리고 죽은 팥쥐로 젓을 담거나 국을 끓여 팥쥐의 어머니에게 보낸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팥쥐 어머니는 그것이 자신의 딸인지 모르고 먹다가, 결국 정체를 알고 놀라 죽는다. 정말 잔인하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신데렐라 이야기는 바로 프랑스의 작가 샤를 페로의 동화집 <마더구즈>에 실린 신데렐라이다. 이를 러시아판으로 바꾼 것이 프로코피예프가 작곡한 <신데렐라>의 바탕이 되었다.

이처럼 고전 동화 신데렐라의 서사는 시대와 지역에 맞추어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몬테카를로 발레단이 새롭게 해석한  <신데렐라> 역시 그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발레 <신데렐라>를 제작한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예술감독 장-크리스토프 마이요는 프로그램북에 게재된 서면 인터뷰에서 고전발레의 재해석 가능성이라는 이점을 말한다. 고전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서사를 알고 있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점과 맞물려 재해석한 그 작품만의 특수한 지향점이 관객들 각자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가는 것이다.

유리구두 없이 맨발로 춤추는 신데렐라의 모습은 2019년 이 발레를 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에게 그것은 높은 굽의 구두라는 사회적인 코르셋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다. 이전에 신데렐라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유리로 된 구두를 신고 춤추는 것이, 심지어 걷는 것이 과연 가능한 지에 대한 의문이 항상 있었다.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신데렐라>는 이 의문에 답을 주었다. 구두는 벗으면 된다. 신데렐라는 맨발로도 춤출 수 있다. 하이힐을 신고 기형적인 자세로 걷는 발이 아름다운가? 아니면 자유로운 맨발이 아름다운가?


그런 한편 나는 또 다른 신데렐라를 원한다. 그것은 왕자가 없는 신데렐라이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기원전 9세기 중국에 기록으로 나타난 이후 지금까지 거의 3천 년 가까이 낮은 사회적 위치의 여성이  왕자와 결혼하여 상위 사회로 진출하는 서사의 전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현실판 신데렐라’라는 단어는 아직도 기사에 등장한다. 

 왕자가 없다면 더 이상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닐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전의 재해석은 시대상에 대한 이해와 함께 해석자의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몬테카를로 발레단은 유리구두를 없앤 신데렐라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선보였다. 유리구두 없는 신데렐라가 가능했듯이 왕자 없는 신데렐라도 가능하다. 

 여기서 참고할 만한 작품으로 왕자가 용이 잡아간 공주를 구한다는 전통적인 플롯을 뒤집어엎은 로버트 먼치의 <종이 봉지 공주>가 있다. 이 이야기에서 용이 잡아가는 것은 공주가 아닌 왕자이다. 왕자를 구하러 떠난 공주는 심지어 입고 있던 옷이 모두 타버려 달랑 종이 봉지 한 장을 뒤집어쓰고 떠난다. 결말 역시 기존 서사와 다른 이 작품은 현재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왕자 없는 신데렐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고전이 사랑받는 이유는 시대와 지역에 상관없이 읽는 이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으며 신성불가침한 것이 절대 아니다. 시대와 지역이 바뀐다면 고전 역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유리구두 없는 신데렐라를 만든 장-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말처럼 고전은 대리석에 새겨진 건 아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 모나코-몬테카를로 발레단 <신데렐라> 2019년 예술의 전당 공연 프로그램북

– Simon Morrison, The People’s Artist : Prokofiev’s Soviet Years,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 그레고리 하트, 임선근 역, <프로코피예프, 그 삶과 음악>, PHONO, 2014

– 음악세계 편집부 엮음, 음악세계, <프로코피에프>, 2002

– 서진주, “<신데렐라>에 나타난 안무 특성에 관한 연구 – 마기마랭,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2010)

– 남종현, “콩쥐팥쥐 이야기, <콩쥐팥쥐전>, <신데렐라>의 상관관계”, 세명대학교 석사학위 논문(2008)


이 글은 2019년 6월 17일 아트인사이트에 게시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2295)

영화 ‘파이널리스트’ 속의 불편함들

Writing

2015년 퀸 엘리자베스 콩쿨 바이올린 부문 결선 과정을 다룬 영화 <파이널리스트>를 보았다. 퀸 엘리자베스 콩쿨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해마다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성악 부문을 번갈아 개최하는 대회로,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 콩쿨, 폴란드의 쇼팽 콩쿨과 함께 세계 3대 콩쿨로 꼽힌다. (세계 3대 콩쿨이라니 도대체 누가 결정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 단어는 내게 마치 세계 7대 혹은 8대 불가사의와 같이 들린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수많은 불편함들이 들어있다. 그 중에는 영화를 보기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불편함도 있었고,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거북하게 만들었던 불편함과, 영화가 끝날 즈음 입밖으로 불평하게 만든 엄청난 불편함도 있었다. 나는 이 불편함들에 대해 쓰고자 한다.

영화를 보기 전 예상했던 불편함은 바로 경쟁에 관한 것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형태의 경쟁이 존재한다. 가장 익숙한 형태의 경쟁이라면 학창 시절 매 학기 반복되던 중간, 기말고사가 있다. 학교 성적과 등수를 두고 벌어지는 이 경쟁은 초, 중,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점점 가열되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정점을 찍는다.

물론 경쟁은 학업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스포츠계의 경쟁인 올림픽, 월드컵 등의 국제 대회는 이미 단순히 프로 선수들이 서로 실력을 겨루는 차원에서 벗어나 국가 간의 경쟁, 혹은 거대한 축제가 되었다. 예술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등단과 데뷔를 꿈꾸는 작가들이 공모전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는 것은 오랜 역사이다. 최근에는 가수, 아이돌을 꿈꾸는 이들이 TV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민의 소중한 한 표 한 표를 얻으며 피라미드의 가장 위와 아래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클래식계에는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콩쿨들이 있다.

앞서 말한 세계 3대 콩쿨 중 폴란드의 쇼팽 콩쿨은 1927년 처음 열렸다. 제 1회 쇼팽 콩쿨에는 20세기의 유명한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결선까지 진출했지만 입상하지는 못했다. 후에 쇼스타코비치가 심사위원장을 지낸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 콩쿨은 1958년 처음 개최되었다. 냉전 시기 소련에서 열린 제 1회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는 미국인 반 클라이번이 우승했다. 영화 <파이널리스트>의 배경인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쿨은 1937년 바이올린 부문 개최로 시작되었다. 제 1회 퀸 엘리자베스 콩쿨에서는 소련의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우승했다. 그 외에도 세계 3대 콩쿨의 입상자들 면면을 살펴보면 참으로 화려하다. 이쯤 되면 나는 유명한 콩쿨이 그 수상자들을 유명하게 만드는지, 유명한 수상자들이 콩쿨들을 유명하게 만드는 건지 궁금해진다.

이렇게 유명하고 오래된 콩쿨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수요가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수요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왜 젊은 클래식 연주자들은 계속하여 콩쿨을 찾는가? 예선부터 본선, 결선.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조바심 속에 매 차례마다 새로운 곡들을 소화해야하고, 참가자들을 극도의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몰아넣는 이 대회에 연주자들은 왜 참가하는가?

그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영화 속 한 참가자는 ‘더 많은 연습 시간을 갖기 위해’ 콩쿨에 지원했다고 한다. 콩쿨이라는 명확한 목표 의식이 자신을 짧은 시간동안 집중해서 연습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콩쿨의 부상인 상금과 공연 기회를 위해 콩쿨에 지원할 것이다.(퀸 엘리자베스 콩쿨 바이올린 부문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부상은 상금 이외에도 각종 연주회와 음반 발매, 다음 바이올린 부문 대회까지 스트라디바리우스 ‘Huggins’의 대여가 있다.) 이러한 기회는 유명 레이블과의 계약 및 음반 발매, 세계의 유명 오케스트라, 지휘자와의 협연 기회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콩쿨은 클래식 연주자에게 종착점이 아니라 과정의 일환이다. 더 좋은 기회를 향해 거쳐가는 길 말이다.

그러나 콩쿨은 1등부터 순위가 매겨지는 경쟁이다. 예선부터 본선, 결선으로 올라갈수록 참가자의 수는 줄어들고, 결선에서도 1등은 단 한 명의 것이다. 따라서 결과는 중요하고, 경쟁은 당연히 치열할 수 밖에 없다. 보다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거쳐가는 과정에서 이처럼 지독히도 결과가 중요한 ‘콩쿨’이라는 것을 맞닥뜨린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영화 속 결선 참가자 이지윤씨와 임지영씨의 대화 장면은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바이올린을 전공해 유학을 하고 콩쿨에 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끊임없는 경쟁에 내몰렸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3대 콩쿨 결선에 진출한 그들은 결선을 앞두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것 같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정말로 그렇다.


영화의 시작, 퀸 엘리자베스 콩쿨의 결선 진출자(파이널리스트)들이 정해진다. 그들이 합숙을 위한 채플에 모여 받은 결선 지정곡은 도저히 연주가 불가능해보이는 극악의 난이도의 곡이었다. 이 곡을 익혀 리허설까지 끝내야 하는 시간은 고작 8일이다.

영화의 초반, 이지연씨는 곡을 익히고 연습을 하느라 몸이 방전되어 피곤하다고 말한다. 다른 결선 진출자들 역시 곡의 템포가 극악이고, 합숙 기간 동안 모든 통신 기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숙소 대문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하루 종일 연습하고, 먹고, 잘 수 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카메라에 담긴 세계 각국에서 온 파이널리스트들의 모습에는 차이점이 있다.

이 차이점이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인터뷰 장면이다. 미국인 참가자 윌리엄 헤이건과의 인터뷰에서는 그의 비브라토가 부드럽다며 그의 연주가 미국적이라는 말이 나온다. 헤이건은 이것에 대해 동의한다면서 자신이 미국에 있었을 때는 항상 프랑스와 독일 음악을 연주하면서도 자신의 연주가 미국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곳에 오니 정말 미국적인 것 그 자체라고 말한다.

조금 더 중요한 인터뷰는 한국인 이지윤씨의 인터뷰 장면이다. 처음에 인터뷰 진행자는 이지윤씨의 이름에 대해 몇 번이고 묻는다. 서양에서 First Name(이름)을 먼저 쓰고 Last name(성)을 뒤에 쓰는 방식과 한국에서는 성을 먼저 쓰고 이름을 뒤에 쓰는 방식이 다른 점이 그들에게 혼란을 부른 것이다. 인터뷰어는 또한 함께 결선에 진출한 또 다른 한국인인 임지영씨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지윤씨에게 재차 그녀가 임지영이 아닌, 이지윤이 맞는지 확인한다. 영어로 표기된 이름이 그들에게는 발음하기도 어렵고, 철자도 길고 복잡한 것이 비슷하게 보인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이름을 영어로 써야 하는 상황을 접했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을 상황일 것이다. 나 역시 잠시 독일에 살며 각종 행정용 문서에 이름을 쓸 때 (Name, Vorname) 칸을 마주하면 도대체 앞의 Name에 무엇을 써야 하는지(풀네임을 써야 하는지, 아니면 성만 써야 하는지) 헷갈려 서류를 아예 잘못 낸 적도 있었다. 겨우 이름을 써서 내도 독일식 알파벳 발음으로 읽힌 내 이름은 한국에서 불리던 내 이름과 달라 번번이 답답함을 느꼈다. 한국에선 ‘홍길동’으로 불리던 사람이 계속 자신을 ‘Gildong Hong’이라고 소개해야 하고, 이마저도 그들의 귀에는 익숙하지 않은 발음과 철자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제대로 내 이름을 발음한 경우는 지극히 소수였다.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진 것이 상대에게는 혼란스러운 것이었고, 반대로 상대에게는 굉장히 당연한 것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이 장면은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속 언저리에서 작은 불편함을 가져다 주었다. ‘경쟁’이라는 요소가 주는 불편함 외에도 문화적 차이로 인한 불편함이 추가된 것이다. 물론 이 두 번째 불편함에는 정말 여러 가지 요소가 있고, 때때로 클래식은 이러한 불편함을 음악이라는 비언어적 매개체로서 초월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클래식은 모든 국가와 계층을 하나로 묶고 통합해주는 역할을 하진 못한다. 클래식은 지루하고 딱딱하다는 생각, 클래식 공연 하면 떠오르는 비싼 가격이나 분위기가 부담스럽고, 잘 차려입어야 하는 인식 등은 클래식 음악에 다가가는 것 자체를 처음부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여기에는 문화적 요인도 작용한다. 클래식의 본고장은 유럽이다. 클래식 음악의 역사는 주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쌓인 것이었고, 러시아 역시 19세기 이후부터 이 대열에 합류했다. 결국 이렇게 쌓인 역사는 권위를 낳는다. (물론 20세기 이후에 이 흐름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기도 하지만, 클래식계의 오래된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은 매우 힘들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퀸 엘리자베스 콩쿨 현장의 모습은 이러한 권위의식의 결정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자는 말의 처음에 “폐하, 신사 그리고 숙녀 여러분”이라고 말한다. 이 한 마디만 들어도 속이 답답하지 않은가? 2015년에?

하지만 권위란 그저 갖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권위를 갖고 있는 이는 그에 걸맞는 책임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영화 속 퀸 엘리자베스 콩쿨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이 점에 대해 많은 의문과 실망, 그리고 불쾌함의 정점을 찍는다.

콩쿨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결선의 연주가 모두 끝나고, 마지막으로 결과 발표가 남았다. 세계 3대 콩쿨 중 하나, 벨기에 여왕의 이름을 내건 퀸 엘리자베스 콩쿨의 우승자는 바로…..

이지윤! 이라는 이름이 불린다.

이지윤씨는 놀라며, 무대 위로 걸어 나가 박수를 보내는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한다. 그러나 그녀의 뒤로 심사위원석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김남윤씨는 호명자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는, 이지윤씨를 향해 한국 말로 (입 모양상) “너 아니야.”라고 말한다. 여기서 모두가 경악한다. 그로부터 3년여 뒤, 영화관 객석에 앉아있던 관객들도 경악한다. 나도 경악했다. 곧 이어 호명자는 착오가 있었다고 우승자는 이지윤씨가 아니라 임지영씨라고 말한다. 이지윤씨는 서둘러 무대 뒤로 들어가고 임지영씨가 나와 수상한다.

착오로 우승자를 잘못 호명하는 엄청난 착오를 벌이고 난 뒤, 호명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와 ‘임’은 한 글자 차이라서 실수를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죠.”

네? 뭐라구요? 권위 있는 세계 3대 콩쿨인 퀸 엘리자베스 콩쿨에서 우승자 이름을 잘못 호명해 다른 사람이 나왔다가 들어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죠.’라는 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일인가요?

물론 그 상황에서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말그대로 호명자가 실수한 것이고,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인데. 그러나 결선 과정을 무대 뒤에서 찍은 카메라에 담긴 또 다른 장면은 이것이 실수인지, 그렇지 않다면 다른 무엇인지 의문을 품게 만든다.


시간을 조금 앞으로 되돌려 결선 연주 차례를 앞두고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지윤씨에게 사회자가 다가가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묻는다. 이지윤씨는 영어식으로 ‘지윤 리’ 라고 말한다. 사회자는 그 이름을 한 번 따라하고 무대로 나간다. 그러나 사회자가 무대 위에서 소개하는 이름은 ‘지윤 리’가 아니다. 발음을 실수한 것이다. 그것을 들은 이지윤씨는 “저건 내 이름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지휘자 마린 올솝은 “그래도 비슷하게 들렸다.”고 말하고는 함께 무대로 나간다.

이 장면과 앞선 합숙 당시 인터뷰 장면에서 진행자가 임지영이라는 이름과 이지윤이라는 이름을 헷갈려 하던 장면이 겹친다. 카메라는 ‘이지윤’이라는 이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혼란과 실수를 몇 차례 담았다. 처음에는 사소해보이던 실수가 영화의 끝에 가서는 엄청난 실수로 끝을 맺는다. 물론 이것은 실수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라는 말도 사실이다. 한국인의 영어 이름이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지윤 리’라는 이름을 발음해야 했던 사람이, 우승자의 이름을 호명해야했던 사람이 사전에 몇 번이라도 발음을 확인하고 연습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단 12명 밖에 되지 않는 결선 참가자들의 이름 발음을 확인하는 것은 그들에겐 그토록 번거롭고 힘든 것인가?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권위라는 것은 우승자 이름을 다른 사람으로 잘못 부른 일을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이다.’라고 말하는 그런 것인가?


영화 <파이널리스트>는 이렇게 보는 내내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콩쿨이라는 소재를 영화로 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 브레히트 반후니커가 선택한 방법은 치열한 결선 무대 연주 장면으로 긴 상영 시간을 채우는 것도, 파이널리스트들의 극적인 개인사나 라이벌 의식으로 드라마를 이끄는 것도 아니었다. 영화는 담담했고, 연주 장면 역시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연주 영상을 보고 싶다면 유투브를 보면 된다. 콩쿨 참가자들의 치열한 경쟁과 드라마를 보고 싶다면 만화 <피아노의 숲>을 추천한다. 그러나 영화 <파이널리스트>는 또 다른 시선에서 본 콩쿨을 담고 있고, 콩쿨에 대해 조금 다른 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불편함도 필요하다. 의식하지 못하는 불편함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