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레터 01. 얼굴

Letters

“정말, 저이의 얼굴을 어디선가 보았어!”

“당신은 부끄럽지도 않나요? 당신은 정말로 그런 사람이에요?
아니에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


만화 작업의 시작은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지난 번 작업이었던 『로트실드의 바이올린』 역시 시작은 주인공 로트실드의 캐릭터 조형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인물의 얼굴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얼굴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말이 『백치』처럼 잘 어울리는 이야기가 있을까.

미쉬낀 공작은 예빤친 장군의 집에서 본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의 사진을 보고 그녀의 미모 이외에도 그 안에 숨겨진 고통을 알아본다.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 역시 미쉬낀의 얼굴을 어디선가 보았다는 말을 던지고 지나간다. 이렇게 얼굴은 『백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그래서 『백치』의 얼굴과 관련된 논문 두 편을 찾아보았다.

한 편은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나타난 얼굴의 문제(2020, 정지원)>이고, 다른 한 편은 <도스또옙스끼의 『백치』속에 나타난 얼굴-표상의 문제(2004, 이득재)>이다.

이 두 논문은 공통으로 한 명의 학자를 주목하고 있다. 바로 임마누엘 레비나스이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하나의 “윤리적 사건”이라 칭한다. 그에 의하면 발가벗겨진 얼굴, 즉, 금방이라도 폭력에 노출된 것만 같은 인간의 연약한 얼굴은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가운데 그 얼굴을 바라보는 나를 부르고, 나에게 호소한다. 이때 우리는 우리를 부르는 타인의 얼굴에 응답해야 하며 타인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럴 때만이 인간은 정의 속에서 신에게 한 걸음 더 다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전체성과 무한』, 임마누엘 레비나스, 2018) 

레비나스의 이 문구는 마치 그대로 『백치』 속 미쉬낀이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에게 건네는 말에서  등장한다.

“나는 아까 당신의 사진을 보고 당신의 얼굴이 나에겐 굉장히 친숙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즉시 당신이 나를 부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나…… 나는 당신을 평생 존경하며 살겠습니다.”
(『백치』,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열린책들, 2009)

미쉬낀은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의 얼굴에서 아름다움만을 읽어냈던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의 초상화 속 얼굴에서 나스따시야의 고뇌와 고통을 읽어낸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함은 결국 미쉬낀에게 있어 ‘책임’을 동반한 윤리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나스따시야의 얼굴에 대한 응답이자 그에 따른 책임으로 미쉬낀 공작은 다소 낭만적인(?) 방법을 택한다. 바로 그녀에게 청혼을 하는 것이다.

“나스따시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스따시야,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스따시야, 나는 그 누구도 당신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가난하게 된다면 나는 일을 할 겁니다, 나스따시야.”(『백치』,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열린책들, 2009)

공작의 이 발언에 모두 비웃는다. 하지만 여기에 새로운 소식이 가미되면서 이야기는 점점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그 이야기는 차후에…)

사실 나는 이 부분의 러시아어 문장인 Я вас… Настасья Филипповна… люблю. Я умру за вас, Настасья Филипповна…(나는 당신을…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러시아에서 만든 드라마 <백치>에서 미쉬낀 공작이 이 부분을 이야기하는 장면을 몇번이나 봤는지 모르겠다.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의 얼굴에 포착된 미쉬낀 공작. 그녀의 얼굴 속 고뇌와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 미쉬낀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책임을 지고자 한다. 그에 대한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의 대답은?! 미쉬낀이 선택한 이 책임의 방식은 과연 순탄할 것일까?! 그 이야기는 다음 편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어쩌면 다음 편지에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나아갈 수도…)

그래서 만화 이야기는 언제 할 건데… 라는 분들을 위해서 미쉬낀과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의 캐릭터 초안 일러스트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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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레터 00

Letters

이 메일은 제정 러시아 시대 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되어…..
라고 쓰고 싶지만, 현실은 2025년 대한민국입니다.

그리고 저는 올해로 6년인가, 7년차 창작자 도자기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고 모르시는 분은 모르는 프로젝트 ‘쩨르진스끼 쏭 땐쓰 앙상블’을 나홀로 진행중인 독립출판 만화가입니다.

‘쩨르진스끼 쏭 땐쓰 앙상블’이요? 된소리에 주의해주세요!
쩨르진스키도 제르진스키도 아닌, ‘쩨르진스끼’입니다!

여하튼 19, 20세기 러시아 문화계에 꽂히게 되어 작업을 시작한지 올해로 6년, 7년이 되었습니다. 처음 선보인 작업물은 2019년 출간한 4컷 만화집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 그 이후> 였고, 그 이후로 2021년 만화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2022년 단편만화집 <6호실에서>를 거쳐 2024년에는 단편만화 <로트실트 실드의 바이올린>까지… 러시아 클래식 음악계부터 문학계까지 종횡무진하면서 내맘대로 만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사실 내맘대로 만화를 그리면서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였습니다. 대학교 시절 처음 러시아문학에 빠졌을때 도스토예프스키로 입문해 지금 최애는 안톤 체호프로 바뀌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언젠가는 꼭 재해석하고 싶은 작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사실 체호프의 수많은 작품들을 만화로 만들어도 한편생이 모자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올해 <백치>에 다시 눈을 뜨게 된 개인적인 사건이 있었고, 이왕 이렇게 된 것 <백치>를 그리자고 결심했습니다!

열린책들 기준 상권 하권 분량으로 총 4부짜리 장편소설인 <백치>는 작업기간을 계산해보니 1부당 2년, 4부에 총 8년이 걸린다고 할 수 있지만 제 인생 계획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넉넉잡아대략 10년이 걸릴 프로젝트입니다.

10년을 건 대형 프로젝트를 혼자만 걷게 된다면 도중에 지쳐 흐지부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만화 <백치>의 작업과정을 나누고자 합니다! 비정기적으로 여러분의 메일함으로 가게 될 메일로 말이죠!

때로는 콘티가, 때로는 <백치>와 관련된 논문을 읽은 소감이, 때로는 캐릭터 디자인이나 중요 장면의 아이디어가 여러분의 메일함으로 배달될 예정입니다. 언제 끝나게 될지 모르는 만화 <백치>의 제작기를 함께하고 싶은 분들은 ‘쩨르진스끼 쏭 땐쓰 앙상블’과 함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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